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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20년 1월 02일
In 365 잠시 가정예배
<참된 지식> : 똑똑하게 살기. 지식의 시대입니다. 인류가 몇 천년 동안 쌓아온 지식이 인터넷에 쫙 깔려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지식이든 접속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소유한 현대인들은 스스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고 자부합니다. 자기 자신이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훈이 필요 없고 훈계가 필요 없고 구원자가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지을 만한 지식과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끊어 버리자”고 외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꾀를 냅니다. 그러나 그 꾀는 “헛된 일”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을 다스리십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심판을 당했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눈을 피해 심술을 부려도 결국에는 부모에게 들통이 나듯이 사람은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꾀를 내고 머리를 쓰며 온갖 작전을 동원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머리를 가지고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웃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은 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다는 것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우주의 법칙 뿐만 아니라 인생의 작은 순간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식 앞에서는 티끌조차도 되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가 아무리 많이 발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꺼져가는 촛불 정도일 뿐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경건한 두려움을 품습니다. 겸손히 순종합니다. 자기 지식과 능력을 감추고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을 따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근본”입니다. 복잡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똑똑하게 사는 걸까요? 정말 알아야 할 지식을 알고 그것을 가장 먼저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말 알아야 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바로 부모가 가르쳐야 할 지식이고 자녀가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머리에 쓴 아름다운 관이요 목에 걸리 금 사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을 힘써 얻으시기 바랍니다. 자녀와의 문답 1문: 미련한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2문: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나요? 답: 비웃으십니다. 3문: 정말 똑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답: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4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답: 하나님을 왕으로 아는 것입니다. 5문: 평생 동안 배워야 할 지식은 무엇인가요? 답: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기도 하나님을 반대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게 하소서. 일평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공부하게 하소서. 찬송 시편찬송가 4장 - 시편 2편
(1월 2일) 잠언 1:7-9, 시편 2:1-4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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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20년 1월 01일
In 365 잠시 가정예배
<행복한 인생> : 즐겁게 살기. 행복이 무엇일까요? 즐겁고 풍요로우며 안전하고 평안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어린 자녀는 부모의 품 안에서 가장 행복하듯이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공급하시는 것을 먹고 누리고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복을 자녀에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을 노래한 시편 1편은 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10장 33절은 율법과 행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역사와 인생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얻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항상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씀에 인생의 뿌리를 둔 사람은 늘 행복이라는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밖을 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물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공기 없이 숨을 쉴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삽니다. 성경은 그들을 악인이요 죄인이며 오만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밖에 서 있는 자들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휘날립니다. 열심히는 살지만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최선은 다하지만 복된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한 나무가 말라 죽듯이 악인들은 끝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도록 훈계함으로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녀는 그 어리석음으로 불행을 자초합니다. 어린 자녀는 그 오만함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녀에게는 슬기로움을 주고 어린 자녀에게는 지식과 근신함을 주어서 복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풍성한 물이 나무를 튼튼하게 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듯이 거룩하고 복된 말씀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자녀와의 문답 1문: 행복이 무엇인가요? 답: 즐겁고 풍요로우며 안전하고 평안한 상태입니다. 2문: 사람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나요? 답: 하나님 품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3문: 하나님 품에 있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답: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4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왜 행복한 일일까요? 답: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5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답: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실천합니다. 기도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배우게 하소서. 찬송 시편찬송가 1장 - 시편 1편
(1월 1일) 잠언 1:1-6, 시편 1편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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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8월 05일
In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 강의. 제4화 <옹고집과 유순한> 좁은 문을 향해 걷기 시작한 크리스천에게 두 사람이 접근합니다. ‘옹고집’과 ‘유순한’입니다. 둘 다 멸망의 도시에서 사는 시민입니다. 온전한 회심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하게 딱딱하게 굳은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고집스럽게 옛 사람을 움켜잡고 있는 사람은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도 조심해야 합니다.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굳은 심지를 갖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먼저, 옹고집은 어떤 유형인지 알아봅시다. 천로역정에 의하면, 옹고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친구들과 안락한 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2) 하늘의 보화를 헛소리로 여깁니다. 3) 성경을 무시합니다. 4)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합니다. 5) 조급하고 화를 잘 냅니다. 옹고집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신의 견해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입니다. 둘째, 유순한은 어떤 유형인지 알아봅시다. 유순한은 ‘나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이 좋은 곳이라는 크리스천의 말을 믿고, 순례길을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짐이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옹고집에 비해 열린 성품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옹고집에 못지 않게 고집스럽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자기의 유익’ 밖에 없습니다. 그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방해하는 두 가지 마음, 딱딱하게 굳은 고집스러운 마음과,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우유부단한 마음을 주의하십시오.
천로역정 강의, (4회) 옹고집과 유순한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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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31일
In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 강의. 제3화 <전도자를 만나다> 멸망의 도시를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크리스천은 여전히 허허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공허와 무력함을 의미합니다. 죄를 자각하고 거기에서 돌이키고 싶으나 방법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올바른 심령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은 구원에 관해 자신의 무력함도 깨닫습니다. 구원에 관해 여전히 자신이 무엇인가 할 능력이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 죄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의 방법을 찾는 크리스천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그의 이름은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오늘날의 목사 혹은 복음사역자를 뜻합니다. 전도자와 크리스천의 대화는 눈 여겨 볼 만합니다. 전도자는 충동적이거나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는 차분하고 세심하며 신중합니다. “왜 이렇게 울고 있습니까?” “세상이 온통 죄악뿐인데, 그토록 죽고 싶어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죠?”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면 어째서 이렇게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겁니까?” 전도자는 감정에 호소하면서 결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통해 크리스천 스스로 자기 영혼을 점검하도록 합니다. 이후 그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합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쏙 빼 놓은 채 전하는 솜사탕 복음이 아닙니다. 그는 죄인에게 다가올 운명을 정확히 전합니다. 둘째,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환한 빛을 전합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열리지 않은 크리스천을 안내해 줄 환한 빛은 성경을 뜻합니다. 전도자는 구원을 얻는 손쉬운 공식 따위가 아니라, 오직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를 찾아갈 것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회심의 과정은 신중하고 세심해야 합니다.
천로역정 강의. (3회) 전도자를 만나다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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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30일
In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 강의. 제2화 <멸망의 도시> 크리스천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멸망의 도시>입니다. 아볼루온이 다스리고 있는 이 도시는 화려하고 부유하지만, 멸망이 예고된 도시입니다. <멸망의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고전7:31).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고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구원을 갈망합니다. 반면에 크리스천의 가족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를 말리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며 차갑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단 한시라도 멸망의 도시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족을 뿌리칩니다. 믿음의 길은 지금까지 살던 삶의 가치에서 돌이킬 때 비로소 보입니다. 이 세상보다 천국을 더 귀히 여기는 사람만 나그네가 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 강의. (2회) 멸망의 도시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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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29일
In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 강의. 제1화 <죄를 깨닫는 크리스천> 천로역정은 한 남자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괴로운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원래 이름은 은혜없음입니다. 남루한 옷은 그의 불의를 상징합니다. 지저분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그가 자기를 파멸의 상태로 이끌고 가는 죄를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실제로 그의 인생을 무겁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성경책입니다. 그가 죄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죄인됨을 자각한, 한 남자의 순례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천로역정 강의. (1회) 죄를 깨닫는 크리스천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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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25일
In 천로역정 강의
무료배포 그림을 사용하였습니다. 맨 아래에 있는 웹사이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 인물 설명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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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24일
In 천로역정 강의
1. 텬로력텽(1895년)의 번역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의 선교사로 한국 이름은 기일입니다. 1888년 25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후에 언더우드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게일 선교사의 사역은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그를 ‘참으로 낭만적인 프로테스탄트’라거나 ‘선교사이면서도 문학, 문화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원주민의 문화와 융합하는데 초석을 놓은 진보적인 신학자’로 평가합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한문과 한글에 능숙했습니다. <한영대사전>과 <사과지남>이라는 한국어 문법책을 편찬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춘향전, 심청전, 구운몽, 토끼전, 옥루몽, 운영전, 숙영낭자전, 창선감의록, 백학선전 등 10여개의 고소설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게일의 가장 큰 공적은 <천로역정>(1895년)을 번역한 일입니다. 게일은 한국 고전 문학을 번역하면서 천로역정이 가지고 있는 플롯을 떠올렸습니다. 이야기 소설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천로역정을 통해서 쉽게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 번즈가 번역한 중국어 판을 참고했는데, Pilgrim's progress가 중국식 번역인 <천로역정>으로 바뀐 이유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천로역정 번역을 먼저 시작한 이는 게일의 아내인 헤리엣이라고 합니다. 헤리엣은 남편인 헤론 선교사가 1890년에 사망하자 이후 1892년에 게일과 재혼합니다. 그 중간, 곧 1891년 즈음에 천로역정 번역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헤리엣이 시작한 번역을 게일 부부가 힘을 모아서 완성한 것입니다. 그 옆에는 교열과 번역을 도와준 한국인 이창직이 있었습니다. 그는 게일의 번역 선교에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텬로력텽의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God”의 번역어입니다. 중국어 역이나 일본어 역에서는 “주재” 혹은 “진신”이라고 했는데,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God”의 번역은 당시 꽤 논쟁이 많았던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는 “텬쥬”를 지지했습니다. 한자의 음독과 한국 고유어와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God”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 게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God을 나타내는 ‘하나님’이라는 번역어는, 유일하고 위대한 것, 지고자요 절대자로서 신비한 히브리어 이름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유일함을 의미하고, ‘님’은 위대한 분을 의미한다. 우리 색슨어에 유래하는 ‘God’은 복수형으로 사용되거나 이방 신들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바라는 목적으로 쓰이기 위해 많은 조정을 해야만 했다. 그리스어 ‘Theos’나 일본어 ‘kami’는 중국의 ‘상제’ 등 이른바 많은 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많은 신들 중에서 최고의 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언어의 명칭들이 오랜 사용기를 거치면서 도달하려고 애썼던 뜻을 한 번에 정확히 얻고 있다.” 게일의 번역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얻었습니다. 게일 선교사의 큰 공로입니다. 이후 1954년까지 텬로역텽은 몇 번의 번역 과정을 거칩니다. 게일 부부가 번역한 1부를 받아 언더우드의 부인이 1920년에 2부를 번역, 출간합니다. 그 후 오천영이 1939년, 1948년, 1954년에 각각 1부와 2부를 번역, 출간합니다. 2. 텬로력텽(1895년)의 삽화 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텬로력텽에는 총 42점의 삽화가 들어 있습니다. 김준근 화가의 작품입니다. 연구가에 의하면, 중국어 판을 참고하기보다는 맥과이어 목사의 주석본에 있는 삽화를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맥과이어 목사가 주석을 단 <천로역정>은 1862년에 영국에 출판되었는데, 그때 셀로스와 프리올로의 삽화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흔히 셀로스 삽화라고 합니다. 1부에는 총 58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텬로력텽>에는 42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김준근이 맥과이어 주석본의 삽화를 참고하기는 했지만, 똑같이 그린 것은 아닙니다. “인물은 모두 상투를 튼 한국인으로 그렸고, 복장도 한복으로 입혔습니다. 천사도 선녀의 모습으로 그렸으며, 진리를 가르쳐 주는 효시, 즉 예수도 갓 쓴 한국인의 그렸습니다”(허경진). 사실 게일 번역본에는 김준근이 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화가 그의 그림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텬로력텽> 삽화 인물들의 넒은 이마, 길고 가느다란 눈, 갈고리형의 코, 여인들의 올림 머리 묘법, 상투를 올리고 밑에 남은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은 남성들의 머리 표현법, 표정 없는 얼굴 등은 김준근의 풍속화 속에 나타나는 인물 묘법의 특징들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신성영). 김준근은 당대의 유명한 풍속화가였는데, 그는 당시 조선에 들어 온 외국인들에게 풍속화를 대량 제작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지금은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지에 천여 점이 넘는 풍속화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텬로력텽>의 삽화가 모두 ‘조선화’된 것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한국 선교의 주요 정책은 ‘네비우스’였습니다. 이것은 북장로교의 선교정책이었는데, 중국 선교사였던 네비우스가 창안한 것입니다. 네비우스 정책이란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을 목적으로 현지인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입니다. 당시 선교 규정에는 ‘모든 기독교 문서는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서민들이 읽을 수 있는 한글과 한국적 삽화로 구성된 <텬로력텽>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발간된 "천로역정: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CH북스)은 당시 실렸던 42점의 삽화를 함께 넣어 그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천로역정 강의, 천로역정의 번역과 삽화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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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너머
2019년 7월 23일
In 천로역정 강의
존 번연의 생애와 신학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셰익스피어와 존 번연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음을 선정적으로 만들고 절망을 숭고하게 만들며 성을 낭만으로 만들고 감상적인 것과 무운시의 기계적 가락으로 공허한 것을 감추는 셰익스피어와 달리, 진정한 영웅적인 자질들인 믿음, 소망, 용기, 확신 등과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점에서나 또한 무운시의 표현력 면에서 번연이야말로 훨씬 뛰어난 작가이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번연이 셰익스피어보다 뛰어난 작가라는 뜻인 것 같지요? 영국의 역사학자 매콜리는 좀더 쉽게 말합니다. “17세기 후반의 잉글랜드에는 많은 명석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당대인의 상상력은 단 두 가지 지성에 의해 사로잡혀 있었다. 그 지성 가운데 하나는 <실락원>에 의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로역정>에 의한 것이었다.” 뛰어난 문인으로 후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 번연이지만, 사실 그는 목사입니다. 그것도 누구보다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한번은 평일 아침 7시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집회에 존 번연이 설교자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1,200여 명이 몰려든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은 번연처럼 설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학문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그만큼 번연은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소설가나 설교자를 꿈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번연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가 직접 쓴 자서전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와 1692년에 출간된 최초의 전기 <존 번연의 삶과 행동에 관한 한 이야기>입니다. 번연은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저의 몰락과 부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게 하시고 친히 그 손으로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존 번연의 회심 체험기입니다. 그는 회심하기 이전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였는지를 처절히 기록합니다. 두려움과 소망, 불안과 믿음, 떨림과 기대 등이 교차하는 자기 심령의 상태를 정직하게 써 내려 갑니다. 그러는 중에 기퍼드 목사의 목양사역과 베드포드 교회 성도들과의 교제에서 큰 도움을 얻습니다. 이제 몇 가지 자료의 도움을 통해 존 번연의 생애와 신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욕하는 땜장이 번연의 출생일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1628년 11월 30일에 유아세례를 받은 것으로 볼 때, 그 무렵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가 태어난 베드포드는 런던에서 약 40마일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베드포드는 처음부터 종교개혁 신학이 활발했던 지역입니다. 프랑스에서 도망친 위그노의 피난처였습니다. 지역 목사들은 국교회에 반발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고, 금식일과 성호를 거부하였습니다. 주로 농사를 짓던 지역이었는데, 존 번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농기구 등을 수리해주던 땜장이였습니다. 번연 역시 그 기술을 물려 받아서 땜장이로 먹고 살았습니다. 존 번연의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번연은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았는데, 10대 중반에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겪습니다. 아버지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죽자마자 다른 여자와 날름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훗날 존 번연이 고백하기를 자신의 욕하는 습관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도 심한 욕쟁이였습니다. 아무튼 번연은 아버지로부터 땜장이 기술과 욕하는 습관을 물려 받았는데, 얼마나 거칠게 욕을 했는지 이웃집에 살던 여자는 “존처럼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귀를 틀어 막았다고 합니다. 1649년 존 번연은 결혼을 합니다. 메리라고 알려진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은 경건한 여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녀가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것은 <평범한 사람의 천국가는 길>,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뿐이었습니다. 결혼 당시 존 번연은 회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여전히 방탕하고 불경건했으며 신성모독적인 말을 내뱉는 부랑아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순수하고 독실한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요? <악인 씨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에서 존 번연은 악인 씨가 경건한 여성을 어떻게 꼬셔서 결혼하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신실한 척 꼬시는 것이지요! 아마 메리를 속인 자신의 경험담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여인 메리는 존 번연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께 청교도 책을 읽었고,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존 번연도 나름대로 신앙에 흥미를 갖게 되었지만, 이 시기의 그는 스스로를 위선자로 여겼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불쌍하고 곤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걱정을 하는 내내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했으며, 내 자신의 의만 내세우는 일로 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의 영성>이라는 존 번연 전기를 쓴 피터 모든은 당시 그가 “가난하고 거칠고 본능적이고 지독한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2. 극적인 회심 “그러던 어느 날, 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저는 제가 하던 땜장이 일 때문에 마을의 거리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집 문 앞에 앉아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가난한 여인 서너 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참으로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거듭남과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행하심, 자신들의 비참한 본성을 자신이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으로 자기 영혼을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신앙을 꿋꿋이 지켜냈는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비참함과 불신앙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등입니다. 번연은 여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자기 신앙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발견합니다.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 여인들은 기쁨과 확신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나에게는 진정 경건한 사람이라는 참된 표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 경건한 사람이라는 참된 표징을 가진 사람이 갖게 되는 행복하고 복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번연은 성도들과 적극적인 교제를 하며 충고와 권면을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시기의 번연을 신앙으로 격하게 몰아가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휘몰아쳤는데, 한날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상태로 인해 버림 받았다는 두려움에 빠졌고, 다른 한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에 푹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의 번연을 구원해준 사람은 베드포드 교회의 기퍼드 목사입니다. 그는 번연을 개인적으로 상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 설교를 통해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폭풍 같은 시기가 지나고 드디어 번연에게 기쁨과 확신의 때가 찾아왔습니다. “이 일은 제게 참으로 경이로웠습니다. 진실로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율법과 진노의 말씀은 반드시 생명과 은혜의 말씀에 자리를 내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3. 탁월한 설교자 1655년 존 번연은 기포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기포드 목사와 베드포드의 교인들은 번연에게 설교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설교를 부탁합니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에 제 마음은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들의 간곡한 바람과 요청에 못 이겨 응하게 되었습니다.” 자그마한 모임에서 말씀을 전한 후에 번연은 본격적인 설교 사역을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번연을 찾았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이 이 무거운 중책을 맡을 수 있는지 고민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자를 들어 쓰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번연의 설교는 명확하고 생생했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모든 것을 정죄하였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저주가 죄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자들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자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선언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세심한 묘사가 가능했는데,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상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경고하고 그로 인한 처참한 상태를 설명하여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를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복된 은혜가 주는 달콤함을 그 누구보다 생기 있게 설교했습니다. “오, 오늘 내 설교를 들은 자들이 죄와 사망과 지옥과 하나님의 저주를 내가 본 것처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여전히 소원한 관계에 있는 그들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 등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번연은 인간의 공로 없음과 무가치함을 전제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생의 교리를 힘 있게 전하였는데, 어느 날은 마치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 등 뒤에서 자신을 격려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성령의 능력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존 번연의 설교 사역은 잉글랜드 전역에 소문이 났고, 그가 설교를 하는 집회에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청중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존 번연은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죄의 엄중함과 복음의 아름다움을 가장 탁월하게 전달했던 설교자였습니다. 4. 옥중의 소설가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고 잉글랜드는 왕정으로 돌아갑니다. 모처럼 만들어 놓았던 웨스트민스턴 표준문서들은 사장되었고, 국교회가 교회의 권력을 잡았습니다. 국가 수장을 교회의 머리로 여기는 국교회는 비국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국교회에 동의하지 않는 목사들에게는 집례권과 설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존 번연은 국교회의 탄압에 동요하지 않았고, 여전히 설교를 강행했습니다. 1660년 11월 12일 체포된 후에 수감됩니다. 죄목은 불법집회 및 비밀모임을 주선하고, 반역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12년 형을 받은 그는 지력과 체력과 실력이 가장 뛰어난 30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베드포드 교회의 신자들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틈틈이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제 평생에서 이 수감생활을 할 때만큼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성경 말씀들이 지금 이 곳과 이 상황에서 제게 밝히 빛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때보다 더 실제적이고 분명하게 다가온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첫 작품은 <묵상의 유익>입니다. 계속해서 <신자의 행위>,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거룩한 전쟁>, <부활>,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도> 등을 집필합니다. 1667-1672년에는 불후의 명작이라 불리는 <천로역정> 1부를 완성합니다. 5. 가족의 역경 및 죽음 존 번연은 두 번 결혼합니다. 첫째 부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메리’입니다. 둘 사이에는 총 네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첫 딸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존 번연은 평생 동안 시각 장애를 앓은 이 딸을 걱정했습니다. 수감 생활 중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깊은 상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메리와는 사별을 하게 됩니다. 10년 만이었습니다. 이후 번연은 엘리자베스라는 경건한 여인과 재혼합니다. 존 번연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엘리자베스가 유산을 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고, 번연을 위해 상원의원을 만나는 등 돕는 배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합니다. 번연과 그의 가족들은 항상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가 집필한 소설이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합리적인 수입을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연과 그의 가족들은 항상 우아하고 즐겁게 살아갔습니다. 그는 모든 보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소유했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행복을 누렸습니다. 노년의 존 번연은 런던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에 큰 폭우를 만나게 됩니다.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임시 숙소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극심한 고열을 앓습니다. 12년 동안의 수감 생활로 인해 몸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후에 숨을 거둡니다. 1668년 8월 12일, 그의 나이 60세였습니다. 6. 칭의 논쟁 존 번연은 여러 명의 논적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가 주로 논쟁한 것은 ‘칭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에드워드 버러우와 논쟁을 했는데, 그는 퀘이커 교도입니다. 이 논쟁은 수감되기 직전인 29세 쯤에 일어났습니다. 존 번연의 칭의론은 간단합니다. “죄인의 칭의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에드워드 버러우는 칭의의 근거를 역사적 예수가 아닌 인간의 내적인 빛에 두었습니다. 번연은 <복음 진리의 개진>이라는 책자를 통해서 반박합니다. 번연이 볼 때 역사적 예수를 배제한 채 자기 안에 있는 신비적인 무엇인가를 근거한 의는 결국 인간의 의를 의지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안에 소유된 무엇인가, 곧 인간적인 요소를 공로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연은 이 주장의 불법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오직 역사 속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의로움이 된다고 반박합니다. 두 번째 논쟁 대상은 에드워드 파울러입니다. 그때 번연의 나이는 수감생활을 마칠 때 즈음이었으니 44세 정도입니다. 파울러는 예수님을 교사요 모범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신학이 말하는 예정교리와 전가교리를 강하게 비판하며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을 반율법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전적 타락 교리도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의로움은 오직 순종에 의해 획득된다고 본 것입니다. 번연은 무지한 자라고 비판하며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칭의’를 다시 한 번 굳건히 변호합니다. 번연은 칭의의 근거가 인간 편에 단 한 톨도 없다고 봅니다. 번연에게 있어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선한 본성과 능력이 전혀 없으며, 의의 근거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인간 밖에 있는 의,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의만이 죄인의 칭의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번연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입장을 충실하게 반영합니다. 7. 천로역정과 존 번연의 일생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은 존 번연 자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번연은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과 인물들을 천로역정에 적절히 등장시킵니다. 1) 멸망의 도성에서 죄를 깨닫고 두려움에 떨던 크리스천의 모습은 죄인 됨을 깨달은 번연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2) 아름다운 궁전에서 경건한 대화를 나누는 네 처녀는 자기 안에 거듭남의 표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여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절망 거인에게 잡혀 의심의 성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던 모습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번연의 모습과 겹칩니다. 4) 유혹과 시험에 무릎을 꿇고,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크리스천은 존 번연 자신입니다. 5) 칭의 논쟁을 벌였던 파울러 등은 순례의 길에서 만난 무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 등은 모두 존 번연의 인생이 반영된 것입니다. 우화에 불과한 천로역정이 강력한 흡입력을 지니는 이유입니다. 천로역정을 읽는 독자들은 책에서 만나는 인물과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크리스천과 함께 한탄을 하고,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고, 함께 기뻐합니다. 처음에는 크리스천이라는 인물을 통해 소설을 읽어나가지만,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순례의 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존 번연이 경험했고, 크리스천이 겪었던 그 길이 지금 나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로역정은 영감이 강하게 살아 있는 책입니다. 독자로 하여금 눈물과 한숨과 웃음과 절망과 환희를 동시에 맛보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이 책은 여러분을 불러내서 나그네로 만든다. 여기에 실린 조언을 따르면, 곧바로 거룩한 땅을 향하게 될 것이다. 게으른 이는 부지런해지고, 눈 먼 이들도 즐거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진귀하고 유익한 걸 원하는가? 우화 속에서 진리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기발한 이야기를 읽어보라.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잠들지 않은 채 꿈을 꾸고 싶은가? 환하게 웃으면서 동시에 눈물을 흘리고 싶은가?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한 장 한 장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자신을 살피며 과연 축복 받은 백성인지 알아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서 오라. 이 책의 세계로.” 존 번연.
천로역정 강의, 존 번연의 생애와 신학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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